[요약]
나의 못나고 마음에 들지 않은 모습들은 남들이 사랑해주지 않을 것 같아서 무난할 듯한 다른 모습 속에 감춥니다
그 모습이 익숙해지면 그 가면이 자신의 참 모습인 줄 착각하게 됩니다
나의 마주하기 싫은 불편한 참 자아에 정직하게 마주서지 않는다면 진짜 ‘나’의 모습이 무엇인지 헷갈리게 되지요
스스로 달아났던 나의 망가진 모습들은 내가 봐도 부끄러워 하나님께서도 나를 싫어하실 것 같아서 상한 자아를 자기 혐오감으로 받아드리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서 숨습니다
내가 착할 때만 사랑하시고, 망가진 모습은 사랑하지 않으실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모습도 사랑스럽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바의 사랑은 집 떠났던 탕자 아들에게 달려와 단 한마디도 묻지 않으신 친밀하고 진심 어린 긍휼의 사랑입니다
실수와 잘못을 해도, 생각보다 형편없고 남들보다 나은게 없어도, 인격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도 괜찮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냥 '그런'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자기평가를 버리고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를, 자신에게 너그럽고 인격적으로 대하길 원하십니다
우리의 존재감을 하나님께서 찾지 않고 다른 사람의 인정, 말, 평가에서 찾게 되면 우리는 불안해질 수 밖에 없게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한다고 얘기하심에도 불구하고 나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우상숭배다 라고 이 책에서는 얘기합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꽤나 괜찮은 존재가 되지 않아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래서 자기를 거절,혐오하지 않고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해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되새겨야 합니다
[좋았던 구절]
* 나의 나된 것이 모두 은혜
* '모양새가 좋을' 때는 마냥 안전한 기분이 든다.
하나님은 그들을 '착할'때만 사랑하실 뿐
망가져 볼품 없을 때는 사랑하시지 않는 것일까?
이 [망가진]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실상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모습을 거부하는 성향이 있다.
거기서 지독한 자기혐오의 씨앗이 뿌려진다.
아프도록 연약한 이 모습이야말로 인간의 특성이며,
인간 조건을 치유 상태로 회복하려면 모두가 반드시 끌어안아야 할 모습이다.
* 하나님을 미워하지는 않아도 우리 자신을 미워한다. 하지만 영적 삶이란 자신의 상한 자아를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된다.
* 이렇듯 달아난 노예처럼 우리는 자신의 실상을 피해 달아나거나
아니면 거짓 자아를 만들어 낸다.
거짓 자아는 다분히 훌륭하고 꽤 매력 있고 피상적으로 행복하다.
우리는 자신이 알거나 느끼고 있는 자아(남들이 받아 주거나 사랑해 주지 않을 것 같은)
를 그보다 무난할 듯한 다른 모습 속에 감춘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자신이 숨어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예쁜 가면이 자신의 참 모습인 줄 착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참 자아-우리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를 사랑하신다.
* 다함 없는 긍휼과 무한한 인내와 감당 못할 용서와 잘못을 기억지 않는 사랑
* 지금 이 순간 네 삶은 상한 갈대지만
나는 그것을 꺾지 않겠고,
꺼져 가는 등불이지만 나는 그것을 끄지 않겠다.
너는 안전한 자리에 있다.
* 사탄의 최대 심리무기는 밑바닥 수준의 열등감, 자괴감, 못난 기분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신의 신분을 알면서도 끔찍한 열등감에 묶여 헤어날 줄 모르며
자기가 쓸모없는 존재라는 의식에 깊이 사로잡혀 있다.
* 자신이 사랑받지 못할 쓸모없는 존재라는 음성들을 우리가 믿을 때 성공과 인기와 권력은 그만큼 매력 있는 대안으로 다가오기 쉽다.
누군가 나를 비난하거나 흠 잡을 때,
내가 거부당하거나 혼자 남거나 버림받을 때,
"거봐. 내가 못난이라는 것이 다시 한번 입증됐잖아."...나는 하등 쓸모없는 자다..
* 자기거부는 영적 삶의 최대 적이다.
우리를 '사랑받는 자'라 부르시는 거룩한 음성에 역행하기 때문이다.
사랑받는 자라는 사실이야말로 우리 존재의 핵심 진리다.
* 예수님의 친밀하고 진심 어린 긍휼을 경험할 때 우리는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는 법을 배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태도를 바꾸기 원하신다.
우리의 자기평가를 버리고 그분 편에 서기 원하신다.
* 모 아니면 도의 사고방식에 지배당하던 나는 연약함을 못난 모습으로, 기복을 겁나는 일로 해석했다. 무의식중에 나는 나 자신에 대한 감정을 하나님께 투사하고 있었다.
나 자신이 고매하고 너그럽고 사랑 많고 상처나 두려움이나 눈물 따위는 하나도 없는-완벽한-존재로 보일 때에만 하나님이 안전하게 느껴졌다.
* 점수 계산을 완전히 그만두고 자신의 모든 죄성까지도 하나님께 드려라. 그분 눈에는 점수도 보이지 않고 점수를 계산하는 자도 보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자녀만 보인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끄러운 행위들을 용서하고
잊으실 뿐 아니라 그 어두움을 빛으로 바꾸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우리의 죄까지도"
* "상처가 없다면 그대의 힘이 어디 있겠는가?
* 우리는 자기 죄의 실체를 부정한다.
과거를 지우려는 부질없는 수고로 우리는 공동체에서 자신의 치유의 선물을 박탈해 버린다.
두려움과 수치로 자신의 상처를 숨긴다면
우리 내면의 어두움은 나타날 수도 없고 따라서 남의 빛이 될 수도 없다.
죄책감은 우상이다.
은혜와 치유란, 삶에 깨지고 상한 자들의 연약한 모습을 통해 전해진다.
다친 병사들만이 사랑이신 그분을 섬길 수 있다.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이라"
(고후 12:9)
* 집 떠났던 아들에게 달려와 단 한마디도 묻지 않으신 아바를 믿을 때
우리는 속으로부터 자신을 믿을 수 있다.
* 나는 자신과, 나 자신의 한없이 초라한 내면과 화해했다.
인간은 얼마나 자신을 미워하기 쉬운가
가장 단순히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은혜이리라.
은혜는 어디에나 있다.